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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78. <광양공>증홍문관제학휘상록묘갈명(贈弘文館提學諱相祿墓碣銘)
1. 문헌 목록 〉22. 22世 〉80. <태사공>택근(澤根)配 유인파평윤씨행록(孺人坡平尹氏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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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광양공>증홍문관제학휘상록효행비(贈弘文館提學諱相祿孝行碑)
증홍문관제학휘상록효행비(贈弘文館提學諱相祿孝行碑) 호남(湖南)의 인사(人士)들이 한결같이 조공의 지극한 효(孝)를 칭송하니 고의 효와 충은 당시의 아름다운 모범이 되었고 후세에 전하여 사모하고 공경하는 바가 큰지라 이를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비를 세우니 이는 여론(輿論)에 의한 것이다. 공의 휘(諱)는 상록(相祿)이요 자(字)는 여집(黎執) 호는 죽재(竹齋)이시다. 충헌공 휘 원길(元吉), 판관(判官) 휘 암(巖), 처사(處士) 휘 득명(得命)과 성순(成淳), 사복시정(司僕寺正) 휘 자옥(自玉), 증승지(贈承旨) 휘 영흥(榮興)이 공의 직계 세계(世系)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효(誠孝)가 남달라 일찍이 모상(母喪)을 당하여서는 매일 묘소에 가서 곡(哭)을 하였고 농사에 힘을 써서 부모 봉양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또 친환(親患) 때에는 엄동(嚴冬)에 얼음을 깨어 고기를 잡아 봉양하고 현몽(顯夢)으로 약을 얻어 효험을 보았으니 그야말로 지성(至誠)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었다.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묘소가 三十리나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도 매일 성묘를 다녔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의사(義士) 七十여명을 모집하여 강화(江華)로 달려가 싸우고 난리가 평정(平征)된 후에 돌아오니, 본 고장의 수령(守令)이 멀리 나와 환영하고 위로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돌아가신 후에 영예스런 증직(贈職)을 받았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공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어 완쾌시킨 미담이 전하며 상을 당하여서는 억지로 살아남아 장상(葬喪)과 제사의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였으며, 가난한 이웃을 도와 구제한 사람이 많았다. 그의 아들 동혁(東爀) 또한 이런 집안의 법도를 계승하여 한 고을에 명성을 떨쳤다. 공이 몸소 실천한 행실이 후손에게 전승(傳承)되어 집안의 명성이 혁혁하니 백세까지 더욱 창성하리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충헌공의 옛집안에 훌륭한 인물 났네 忠獻古宅 篤生哲人 삼강오륜을 갖추고 행실이 어질었네 三綱完備 百行由仁 자손이 끊이지 않고 대대로 창성하리 爾類不絶 來世振振 그 아름다움 새기니 경모함 더 새톱네 顯刻闡美 敬慕維新 壬午年 十二月 上旬 資憲大夫 議政府贊政 侍講院詹事 完山 李載現 지음 通政大夫兵部 員外郎 平山 申鉉台 씀 孫 尚勲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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